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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이에무] Shadowlord가면라이더/Ex-Aid 2017. 9. 27. 23:42
─ 해당 글은 엔(@nn_nn1)님(+이름 모를 엔님의 지인분)의 커미션으로 진행한 글입니다.
커미션 주신 분이 히이에무라고 하시어 히이에무입니다만
히이->에무 느낌이 강합니다.
메인 주제는 '태들 판타지의 마왕과 그 세계에 들어간 에무 AU +@' 입니다.
사실 이 주제를 보고 아기복님의 모 회지와 대단히 겹치지 않을까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전혀 다른 물건이 나왔습니다! 안심 ^^!
C형이었습니다만 여러 이유로 C형+A형 => 24P 정도의 분량입니다.
12월 히어로온이나 동네 페스타에서 배포를 하신다 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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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아직도 기억하는 그 날은 ‘적’의 마을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던 날이었다. ‘적’, 인간들은 그런 것이 흘렀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마력의 흐름.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 기류가 일족에게 해가 될지 아닐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현장을 보기 위해 나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마을에 잠입했다. 이 모습은 꽤 그럴싸한 모양이다. 몇 번 마을에 들락날락할 동안 어느 누구도 내가 그들의 적이며 또한 마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 자신을 마왕이라고 새삼스럽게 호명하기에도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이 단어만큼 인간들에게 있어 나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말은 없을 것이다. 너는 천재이다. 네가 할 일은 일족을 살리는 일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들어 왔고, 나 또한 그것을 아주 당연히 여겼다. 일족을 지키는 것은 나의 사명이었다. 나는 일족을 구했다. 일족을 치료하고, 일족을 위해 검을 휘둘렀다. 나에게 베지 못하는 것은 없음이며, 이 검은 모두 일족을 위해 있음이다. 그런 삶을 살았다. 나는 어느덧 일족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적들은 ‘마왕’이라고 불렀다. 호칭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적이 나를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경외라는 것은 깔보지 않음을 의미한다. 내가 강할수록 적은 일족을 노리기 어려워진다. 나의 사명을 위해서라도 그 편이 좋았다.
그럼에도 죽는 이는 죽고, 사는 이는 산다. 그것은 우리 일족에게도, 우리 일족에게 늘 칼을 겨누는 ‘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모두에게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나 역시 그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아버지의 목소리와도 닮게 들렸던, 그러나 실상은 전혀 같지 않던 목소리가 내게 말한다. 그러면 곧 그것이 현실이 된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게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목소리는 끊임없이 내게 말했다. 너는 사는 것이 숙명이다. 살아남아라. 계속 살아남아라. 그래. 이것은 정해진 것이다. 일족을 지키는 모습이 아닌, 다른 나의 모습을 상상한 적은 없다. 후회 몇 개는 있을 지라도,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어느 정도는 만족하고 있다.
불만은 가진 적이 없다. 그러나…….
“히이로 씨?”
기류가 흐르던 곳으로 가 보니 그가 있었다. 그는 마을 광장에 있었다. 그리고 나를 부름과 동시에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저기에 걸릴 만한 게 있던가? 어이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 그의 동작이 지나치게 큰 탓일 테지.
그는 어영부영 바지를 탁탁 털며 일어섰다. 난감한 웃음을 짓는 이의 얼굴은 확실히 마을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마을에 저렇게 깔끔하고 또렷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본 적이 있는 듯 아는 척을 해왔다.
나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나를 아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히이로라는 이름은 들은 적이 있다. 아니, 들었다 정도로만 형언하기에도 어렵다. 그것은 내가 받은 이름이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쓰였던, ‘누군가’가 만들었던 가상의 이름이라 그것을 아는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은 죽은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보는 인간이 그 이름을 호명한 것이다.
“그게 누구지?”
나와 ‘그녀’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하는 이름이다. 내 반응에 그는 깜짝 놀라며 눈을 몇 번 깜빡인다. 그러더니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몇 초간 뚫어져라 바라본 뒤에야 그는 배시시 웃었다.
“히이로 씨일 리가 없구나. 여긴 게임 세계였지.”
“게임?”
나의 되물음에 그는 난처한 얼굴을 한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푹 숙이더니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덧붙인다. 아무래도 혼자서 뭘 납득하고 뭘 알고 이런 모양인데, 나로서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이지?”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제 아는 사람이랑 많이 닮아서. 그만 실수해버렸네요.”
“아는 사람?”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그가 저렇게 긴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꽤 엄격한 사람인 모양이다. 아니면 안 친하던가. 내가 인간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인간 세계의 감정 기류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아무래도 좋다. 너는 누구지? 이 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묻자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호죠 에무라고 합니다. 에무라고 부르시면 돼요.”
“그런가. 에무.”
묘하게 울림감이 있는 이름이다. 입에도 잘 남는다.
“저, 당신은 뭐라 부르면 되지요?”
그, 호죠 에무는 입을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나는 특별히 이름이 없다.”
내 대답에 그는 당황한 티를 잔뜩 낸다. 곧 나는 뒤에 말을 덧붙였다.
“정 나를 부르고 싶다면 네가 아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붙여도 좋다. 히이로라는 그거.”
“에엣. 그래도 되는 거예요?”
“이름이 없다고 해서 멋대로 이상한 것으로 불리는 건 사양이니까. 대충 그걸로 하지.”
“…….”
에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히이로 씨. 잘 부탁드려요.”
내게 부탁할 일이 뭐가 있는 것이지? 의문을 감출 수 없었으나 그가 활짝 웃는 것을 보자마자 마치 정지마법에 걸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 단 한 순간일 것이다. 나는 알았다. 그의 웃음은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사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이름. 오점도 후회도 하나 없는 삶에서 유일하게 잃어버린 것.
“히이로 씨?”
잃어버린 이를 생각하던 와중, 내 시야 앞을 에무가 손으로 휘휘 젓고 있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요 근래 이렇게 멍하니 있었던 적이 없는데. 사키의 생각을 너무 많이 했던 모양이다.
“괜찮아요? 제가 뭐 잘못했나.”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참. 알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지?”
내가 묻자 에무는 곧바로 대답했다.
“혹시, 마왕성이 어디인지 아시나요?”
“마왕성?”
우리 집 이야기다. 인간들은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네. 마왕을 쓰러뜨리고 이 게임을 클리어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거든요. 이 마을에 온 뒤로 그걸 물어보고 다녔는데 아무도 알려주지를 않아서.”
“원래 세계?”
“저, 원래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요.”
에무의 웃음이 묘하게 보였다. 여기 세계가 아니라니, 무슨 말이지? 내가 사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이상하게 히이로 씨한테는 다 말해버리네.”
의아해하는 내 반응을 본 모양인지, 에무는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인 뒤로 자기 세계에 대해서 더 말하지는 알았다. 상관은 없다. 그의 세계가 어떤지는 그다지 내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여하튼 목적은 이루었다. 그 기류는 내게 있어 위협이 될 기류였다. 그 안에서 나는 사키를 닮은 웃음을 짓는 청년을 만났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다른 세계에서 온, 나를 죽이러 온 존재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 운명이.
“그래서 마왕성 말인가.”
“네.”
“마왕성의 위치라면 알고 있다.”
“아, 정말요? 수고를 덜었네요.”
에무는 안심한 듯 아까보다 긴장이 풀린 얼굴이다.
“그래서 어떻게 가면 되나요?”
“시간 아깝게 가타부타 말을 붙일 필요가 있나? 그냥 내가 안내하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내 말에 에무는 크게 놀랐다.
“네? 위험하지 않겠어요?”
“걱정 없다.”
나는 자신 있게 말했지만 에무는 영 떨떠름한 얼굴이다. 내 실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그렇지만 마왕성에 보통 인간은 못 간다고 들었는데…….”
“너는 보통 인간이 아닌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면 보통 인간은 아니겠지만.
“예? 아. 일단은 이 세계에 선택받았다는 설정이거든요.”
설정은 또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마왕을 죽이도록 말이지?”
“네.”
운명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이 순간 내게는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내가 죽을 자리가 생겼다고 하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목소리다. 무엇이 이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들린 이상 거부할 수는 없다. 내 일족들도, 인간들도 그러했다. 그러니 아마 나는 그의 손에 죽을 테지.
하지만 그 방법은 내가 선택할 것이다.
“괜찮다. 나도 마왕성에 갈 정도로는 강하다.”
“그럼 다행이지만…….”
“따라와라.”
내 말에 에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익숙한 길 쪽으로 걷자, 에무는 그 뒤를 쫓아왔다. 우선 마왕을 만나면 그만이라는 것이겠지. 그러나 너는 아직 모른다. 네가 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실은 그것이 궁금해서도 있다. 나는 알고 싶은 것이다. 적어도 나를 죽이도록 선택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
이동마법을 걸면 순식간인 거리지만, 인간인 에무의 페이스를 맞춰 걸으려면 그 마을에서 내 집까지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아마 며칠 노숙을 해야겠지. 불편함이야 거의 없으니 다행인데 에무 쪽이 문제다. 첫 날에야 호기롭게 앞으로 걸어가던 에무였지만 지치는 것도 빨랐다. 애초에 돌부리 하나하나에 걸려 넘어지고 다녀서야 금방 지치는 것도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매번 한숨을 쉬는 것도 일이었다. 이렇게 허술한 녀석이 나 없었으면 어떻게 내 성까지 올 생각이었던 건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히이로 씨 체력이면 확실히 마왕이랑 싸워도 되겠어요.”
결국 이튿날 밤 뻗어버린 에무가 한 말이었다.
“네가 넘어지느라 소모한 체력만 빼도 이 정도는 될 거다.”
“끄응…….”
에무는 노숙을 위해 대충 펼친 모포 위를 뒹굴었다.
“마왕성이 이렇게 멀리 있을 줄이야.”
“네 말을 빌리자면, 최종보스의 던전이 그렇게 가까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만요…….”
마왕성, 아니 내 집까지 가는 여정 중에 에무는 내게 꽤 많은 자기 세계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세계의 그는 사람을 구하는 의사가 되기 위해 수련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을 위협하는 ‘버그스타’라는 이름의 적과 싸우는 중이라는 모양이다. 확실히, 그 역시 나처럼 싸우는 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눈에서 보이는 강인한 의지는, 그가 확실히 전사의 혼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뭘 하나, 있는 장애물 하나하나에 걸려 넘어지는 녀석인 것을.
“마왕을 쓰러뜨려야 한다고 했지.”
에무가 뒹굴던 모포 위에 앉아 나는 말했다. 데굴데굴 구르던 에무는 내가 앉자 조금 긴장한 듯 몸을 멈추었다.
“왜 그래야 하지?”
“이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제 세계도 위험해져요.”
에무는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서둘러야 했어요. 이 게임을 깨는 데에 시간이 걸리면 걸릴수록 세계는 위험해지고 제 소중한 사람들도 다치게 되니까.”
“그런가.”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마왕성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위험하다고. 반드시 죽을 거라고.”
“그 말이 맞을 지도 모르지. 마왕은 강하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엔 조금 민망하지만.
“하지만 가야 하는 걸요.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누가 봐도 무모해 보였을 거다. 다짜고짜 마왕성에 간다 하는 사람은.”
에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그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그래도 히이로 씨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
“지금까지 히이로 씨가 도와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함은 아름답지만 또한 상처를 입기에도 좋다. 그런 의미로 보면 그는 확실히 수정이 떠오른다. 수정은 언뜻 보면 부서지기 쉽게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벼려 내면 그것의 가치는 뛰어오른다. 일족 중에서도 그 수정을 벼리는 것에 생을 쏟아 붓던 이가 있었다. 확실히, 눈을 쉽게 떼기는 어려운 존재감이다. 그도, 수정도.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수정 같던 이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 이유를 알아야 하는 일인가?”
“저는 이방인이고,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저를 도와주지 않았으니까요. 히이로 씨가 저를 위해 시간을 써 주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
왜일까. 나도 그다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지루해서?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고작 지루하다는 이유로 나의 적이 될 녀석을 내 집으로 들여야 할 이유는 나에게 없다.
- 히이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나를 ‘히이로’라고 부르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지금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너도 닮았다. 내가 알던 누군가를.”
“그래요? 만나보고 싶네요.”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이미 없으니까.”
“…….”
에무는 놀란 얼굴을 하다가 곧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상관없었다. 이미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인간과 일족의 싸움 속 아주 우연히 만났던 인간. 인간의 ‘왕국’의 ‘공주’였던. 나를 ‘히이로’라고 불렀던 유일한 사람.
- 영웅이라는 뜻이야.
왜 그렇게 부르나. 이름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런 말을 들었다. 나는 마왕이다. 내 정체를 알고서 그런 소릴 하는 건가? 나는 되물었다.
- 종족 같은 건 몰라. 당신은 나를 구해줬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소중한 인간, ‘사키’는 웃었다. 나는 그 때 깨달았다. 인간들이 말하는 ‘구원’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이런 순간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살았던 것이라면 이 삶은 나쁘지 않다. 사키가 목숨을 잃은 뒤에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사키를 잊지 않는다. 그 존재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 삶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에무는 어딘가 사키를 닮았다. 분명 그 이유일 것이다. 내가 그에게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나 보네요. 그 사람이 아닌 저도 이렇게 도와주실 정도면.”
그는 한참 뒤에 말했다.
“좋은 사람이었겠네요.”
“그걸 네가 어찌 알지?”
“히이로 씨가 좋은 사람이니까요. 그런 히이로 씨가 소중히 여겼는데, 나쁜 사람일 리가 없잖아요.”
나는 피식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너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그렇게 간단하게 나를 믿어버리는 것인가. 나는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내가 너를 죽여야 할 상황임에도 그런 생각이 들고 만다. 너는 과연,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도 시간이 흘렀다. 생각보다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성이 보였다. 짙은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첨탑이 여러 개 둘러싸고 있는 본성 앞에 거대한 성벽이 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계되었을 그 성은 원래 인간의 것이었으며, 지금 그 곳은 나의 집이다.
“다 왔다.”
“저기로군요.”
에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마왕성 앞이라고 생각해서 긴장한 것일까. 하지만 그 뒤에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니 전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네가 그렇다면, 내가 망설일 이유는 없다.
성의 문은 간단히 열렸다. 그는 의외의 전개에 놀란 듯 보인다. 무엇을 상상했지? 몬스터가 바글바글한 세상? 원한다면 만들어 줄 용의는 있지만, 나는 무익한 싸움에 일족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다. 이 싸움은 나와 에무의 싸움이다. 일족들이 힘을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 조용한 성을 에무는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적이 나올까 경계하는 것이다. 나는 그를 두고 먼저 앞장서 걸었다.
“적이 나오면 어쩌려고요, 히이로 씨.”
“걱정 없다.”
“같이 가요.”
에무가 허겁지겁 나를 쫓아오려다, 마침 있던 계단에 걸려 우당탕 넘어진다. 그런 주제에 무슨 마왕을 물리치겠다는 거냐. 한심함을 담아서 말하니 에무가 난처하게 웃는다. 또 사키를 닮은 웃음. 그러나 나는 이제 사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서?
“괜찮겠죠. 그래도 히이로 씨가 있으니까.”
곧 그 말을 후회할 텐데. 그 생각이 듦과 동시에 또 가슴이 턱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아. 이 감각은 익숙하다. 얼마 전에도 느꼈던 탓일까?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감각을 느낀 건 조금 더 전이다. 더 기억을 쫓아 보니 알 수 있었다. 너무 머나먼 기억이라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야 할, 그러나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 나를 데려가, 히이로.
나는 그 때 너를 데리고 갔어야 함을. 나는 사키를 데려가지 못했다. 그 결과 사키는 나와의 만남을 이유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만족스러운 내 삶에서 단 하나의 후회가 있다면 그것이다. 그 때, 나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고민했다. 사키를 데려가는 것이, 정말로 그녀가 행복할 길일까? 그걸 고민할 시간에 말을 그대로 들어줬어야 하는 것을, 나는 어리석어서 내 시야 안의 일밖에 보지 못했다. 그 결과 후회를 낳았다.
아아. 나는 알았다. 그 때의 두려움과 같다. 이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가?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 선택을 대가로 나는, 또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
두려웠다. 호죠 에무를 죽이는 것이.
“…….”
“히이로 씨?”
말이 없는 나를 에무는 걱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본다. 일견 초점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 칠흑처럼 새까만 눈.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지나칠 정도로 순수한 영혼. 이 자리에 일족들이 같이 있었다면 지극히 탐냈을 만한, 아주 아름다운 인간의 영혼. 갑자기 입 안에 쓴 맛이 돌았다. 이 역류하는 괴로움은 무엇인가. 나는 너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너를 죽여 내 운명을 바꾸어야만 하는 것이었는데.
“……과한 기대는 하지 마라.”
“예?”
“네 기대는 감사하다만, 내가 도움이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럴 때엔 제가 해쳐 나가야겠죠. 히이로 씨를 도와야 하니까.”
“…….”
부디 그럴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나는 또 다시 역류하려는 것을 삼켰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하고 싶던 말. 하지만 조금 더 아껴야 한다. 지금은 안 된다. 지금은 아니야.
에무와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중앙에 있던 커다란 문을 열었다. 원래 그 방은 식당으로 쓰이는 곳이다. 에무의 표정을 보니 역시 놀란 눈치였다.
“넓은 방이네요.”
“식당이다.”
“이렇게 넓은 곳은 처음 봐요.”
“그런가. 네가 사는 곳엔 이런 곳이 없나?”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갈 일은 없다고 봐야죠.”
“왜지?”
“연수의 월급으론 무리예요…….”
에무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마침내 나는 결심할 수 있었다. 역시 나는 운명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운명을 알고 있는 건 분명 그것을 바꾸기 위함이니까.
“그거 잘 되었군. 여기 식사도 네게는 처음일까?”
나는 박수를 한 번 쳤다. 그러자 식탁 위는 온갖 식재료로 가득 찼다. 육류부터 해산물까지. 인간이 좋아한다고 하는 음식은 전부 가져다 놓았다. 에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들어본 적이 없는 탓이다. 에무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고 있었다. 무엇에 놀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마법? 아니면 눈앞에 펼쳐진 음식? 나는 에무를 흘끔 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먹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다 준비해 봤는데.”
“…….”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는 가장 상석인 자리에(인간의 기준이다) 앉았다. 이 자리는 오래 전부터 내 자리였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나와 일족들은 원래 식사라는 것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 이 식당은 오로지 인간들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장소다. 나는 자리에 앉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에무를 보았다.
에무는 나의 반응을 보고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에무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 하는 거겠지. 에무는 나와 식탁, 그리고 식당 안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 함께 여행하던 며칠 동안 그 나름대로 내게 정이 들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조금은 기뻤다.
“에무.”
나는 그를 불렀다. 나를 마주보는 그의 시선은 복잡하다.
“네가 짐작하는 대로다.”
나는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내가 이 성의 주인이다.”
“히이로 씨.”
“내가 널 배신했다고 생각하나?”
에무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었다. 인간이란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겨우 고기 하나를 먹을 수 있다는 모양이다.
“내게 ‘마왕성’의 위치를 물은 건 너다. 나의 집이니 알려주었을 뿐이고.”
“…….”
에무가 입술을 씹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먹지 않으면 싸울 수 없다. 너는 이미 충분히 지치지 않았나? 아니면 음식들이 마음에 들지 않나?”
“히이로 씨!”
“무엇이 문제인가. 호죠 에무.”
나이프를 놓고 나는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문제라 아직도 자리에 앉지를 못하나. 음식이 식는다.”
“히이로 씨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에무가 갑자기 의표를 찔러 온다.
“지금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아요? 마왕성을 물었을 때, 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히이로 씨는 알았던 거잖아요. 내가 적이라는 걸.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그랬지.”
“그런데 왜 이렇게 태연한 거예요. 나는…….”
태연하다고?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나? 아마 네 생각과 나는 정확히 반대일 것이다. 태연할 리가 없지 않나. 나는 매 순간마다 받아들이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너와의 싸움, 그리고 어느 쪽이 마무리 지을지 모르는 운명을. 내가 바꾸려는 운명이 어디까지인지.
에무. 나는 너를 만나러 가지 말았어야 했다. 네가 누구인지도 몰랐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너를 맞았을 것이다. 네게 온정을 베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고, 내가 바꿀 운명에 대한 확신도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나의 목적을 위해, 나의 일족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사키를 잃은 그 날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재차 흔들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에무. 너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본 너는 상냥한 사람이다. 내가 흔들린다면 너 역시 흔들리겠지. 그렇기에 네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매 순간이 고통일지라도, 너를 죽이는 것이 내 숙명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멈출 수는 없어.
“태연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있나?”
“…….”
“너와 나는 적.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한 마음이 흔들릴 일은 없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래야만 너는 움직일 것이다.
“……알겠어요.”
에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오른쪽 옆 자리에 앉았다.
“먹을게요. 히이로 씨가 준비해 준 거니까.”
“그래야지.”
에무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가장 가까이 있던 스테이크부터 썰기 시작했다. 스테이크에 아직 미미하지만 연기가 나고 있었다. 아직 식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에무에게 준 스테이크는 과거 사키가 최고로 맛있다고 했던 레시피를 재현한 것으로,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그 스테이크는 씹을 때 배어나오는 육즙과 향의 조합이 절묘하여 인간 중 누가 먹어도 최상급의 맛일 거라고 했다.
“맛있는 건 스테이크뿐만이 아냐. 샐러드의 야채도 상당히 신선하고, 뒤에 놓여 있는 산해진미들까지. 맛이 없는 게 하나도 없어, 히이로. 어디서 이런 걸 다 구했어?”
그리운 인간의 모습이 에무 위의 겹쳐지다 사라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에무는 이미 꽤 많은 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에무의 표정을 보니, 즐거운 식사인 모양이었다. 혹은 처음이거나.
“맛있나?”
“최고예요. 히이로 씨랑 싸워야 하는 상황만 빼면.”
씁쓸히 웃던 에무가 퍼뜩 나를 보았다. 내 접시가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
“안 드세요?”
“안 먹어도 된다.”
“체력이 부족하면 싸울 수 없다 한 건 히이로 씨잖아요.”
“나는 음식을 먹는다고 체력이 회복되지 않는다.”
음식을 우물우물 씹으면서도 에무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 짧은 순간에 에무가 느꼈을 이질감에 대해 나는 알 듯 알지 못한다. 에무는 알겠다는 듯 그 뒤는 묻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되었냐.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았냐. 궁금한 것이 많았을 법도 하건만 에무는 무엇 하나 묻지 않았다. 그것이 역으로 내게는 괴로웠다. 네가 나에 대한 미련이 남은 것일까. 그래서 그걸 떨치기에 침묵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이 게임의 설정에 따르면, 마왕이 죽어야 세계는 평화로워진다고 해요.”
“그런가.”
그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는 것일까.
“하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히이로 씨는 이렇게 좋은 분인데, 마왕이라는 이유로 당신을 죽여야 하고 그래야만 평화로워진다는 것이.”
“…….”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네게 생각보다 고평가를 받고 있던 것은 꽤 감사한 일이다만. 그것이 네 일이라면 해야 하지 않겠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에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없어요. 내가 이 손으로 히이로 씨를 죽이면 정말로 평화가 오나요?”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에무가 물었다. 나는 나를 향한 뜨거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뒤의 일은 나는 모른다. 그러려니 짐작만 할 뿐이지.”
“히이로 씨는 무엇을 위해 싸우나요?”
에무는 식기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저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히이로 씨를 죽여야 해요. 그럼 히이로 씨는 무엇을 위해 저를 죽여야 하지요?”
그것을 네가 알아서 뭘 하려고.
“운명. 너를 죽임으로서 내가 바꿀 운명.”
하지만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를 쓰러뜨리면 내 운명은 분명하게 바뀔 것이다. 어차피 지금 남아 있는 인간들 중 나를 막을 존재는 없다. 나는 살아가며 수많은 일족을 잃었다. 이제 인간과의 전쟁을 종결할 때가 왔다. 나를 죽이기 위해 선택받은 네가 내 손에 죽는다면, 그것은 나의 승리를 의미하지. 나는 인간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들이 내 일족을 죽인 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
에무가 입술을 짓씹는 것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요!”
“죄의 여부는 네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 너는 우리의 싸움을 하나도 알지 못한다.”
“히이로 씨!!”
“아직도 싸워야 할 이유가 부족한가? 무엇을 망설이지? 내가 너의 ‘동료’를 닮았기 때문이냐?”
그 말에 에무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흔들림은 멈춘다.
“히이로 씨와는 관계없어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당신은 당신이니까.”
에무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이름 모를, 그러나 차오르고 있는 감정을 하나하나 눌러가며 하는 말이다.
그래. 그러면 된다. 너는 그렇게 싸울 준비를 하면 된다.
“다 먹었다면 준비해라. 너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정한 싸움터로 걸어갔다. 에무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이제 그럴 필요는 없을 테니까.
내가 서 있던 곳은 마왕성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본성의 옥상이었다. 에무는 나를 쫓아온 모양인지 내가 옥상에 들어서 그를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멀찍이 보이는 인간들의 마을을 등지고 내 앞에 나타난 에무는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그러다 그는 곧 미소를 짓는다. 성에 들어가기 직전에 잠깐 보았던, 즐기는 얼굴.
나는 알았다. 그것이 에무의 준비라는 것을.
그렇다면 나는 너와의 싸움에 만전의 태세로 임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걸 바라지는 않았어.”
에무는 말했다.
“마찬가지다.”
나는 대답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피할 수 있었다면 피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았으면 되는 거였어.”
“그렇다면 너는 영원히 ‘게임’을 클리어할 수 없게 된다. 네 세계를 구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의지는 그것에 꺾일 만큼 약한 의지인가?”
“다른 방법이 있었을 지도 몰라.”
“아니. 없다.”
나는 단언했다.
“에무, 네가 말하는 것은 꿈이고 몽상에 불과하다. 내가 너와 여행하던 며칠간,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안 했을 거라 생각하나? 하지만 아니다. 이것이 ‘현실’이다. 네 ‘게임’은 이렇게 되어 있는 거다.”
“알고 있어.”
에무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이 싸움이 네가 원하는 거라면.”
에무의 손에 검이 쥐어졌다. 그것은 이 세계가 호죠 에무라는 용사에게 준 선물일 것이다.
“노 컨티뉴로 클리어해주지, 마왕!”
“와라. 호죠 에무!”
에무가 내게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와의 싸움터를 옥상으로 고른 이유는 당연히 내게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손끝에 검은 구를 만들어, 나는 그대로 그것을 에무에게로 날렸다. 에무의 발밑에 폭발음이 크게 울렸다. 그는 용케도 내 공격들을 피해, 검의 기운을 내게로 쏘았다. 피하려고 해도 흔적이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의 모습을 버렸다. 이제 에무가 아는 ‘그’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겠지. 본래 모습을 드러낸 나를 보는 에무의 표정이 어떤지는 보이지 않았다. 눈은 나쁘지 않으나 내게 보이지 않는 건 내가 스스로 눈을 가렸기 때문이겠지. 나는 에무를 몰아붙였다. 인간의 모습일 때보다야 지금 모습이 마법을 구사하기 훨씬 좋다. 더군다나 지리적 이점을 내가 갖고 있으니 상황은 유리하다. 에무가 서 있던 옥상은 이미 내가 뿌린 마법구로 상당히 무너져 있었다. 에무는 그 와중에도 내 공격은 대부분 피했던 모양이지만, 그가 원래 입고 있던 새하얀 옷은 이미 더러워져 있었다. 그냥 보아도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마주한다. 너는 포기하지 않았다. 너는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죽일 수 있을 지를.
재미있다.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그래. 이대로, 호죠 에무를 죽이는 거다!’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멈칫했다. 내가 여태 거스르려 했던 것은 이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호죠 에무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했던?
‘뭘 하고 있는 거지? 네 목적은 그것이다. 어서 그를 죽여.’
아니야. 나의 목적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땅을 밟아 에무와 같은 위치에 섰다. 에무는 놀란 듯 보였다. 아마 지금 그가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스스로 우위를 포기한 셈이니까. 상황이 바뀐 게 아니라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에무.”
나는 말했다.
“히이로 씨.”
“아직 그 이름으로 부르는가.”
“그렇게 불러도 된다고 했으니까.”
지친 숨을 쉬면서도 에무의 눈에는 여전히 빛이 있었다. 나는 이 빛에 이끌려 왔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나는 너를 쓰러뜨리려 하였고,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서.
“나는 너를 죽여야만 한다.”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네게도 기회를 주겠다.”
“기회?”
“이번에 나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이긴 것이다. 반대로 내가 죽는다면 네 승리다. 단 한 순간이다. 실수는 곧 죽음으로 직결할 거다. 어쩔 테냐?”
“…….”
에무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 뒤 이어 말했다. 내가 너에게 달려들 것이고, 너는 그런 나를 이기면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오른손에 검을 쥐었다. 나의 마력으로 만들어낸 나의 분신. 일족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인간을 도륙했던 바로 그 검이다. 나는 검을 에무에게로 향했다. 검을 꽉 쥐고, 그대로 에무에게 직선으로 돌진했다. 에무는 자세를 고쳤다. 나를 받아치기 위함이다.
이대로 에무를 베어낸다면 내 승리다. 알고 있다. 그러나 계속 내 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뭘 망설이나. 호죠 에무를 죽여. 그게 네가 할 일이야. 끊임없이 들리는 이 소리는 에무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목소리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이다.
에무가 내 검을 쳐내려 자세를 낮추었다. 그것을 신호 삼아 나는 내 긍지를 손에서 놓았다.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에무는 내 몸에 아주 군더더기가 없는 상처를 내었다. 이것이면 되었다. 만족하며 나는 쓰러졌다.
“히이로 씨!”
에무가 나에게 달려와, 쓰러진 내 몸을 일으켜 안았다. 죽음이 가깝다는 것은 알았다. 슬픔으로 일그러진 에무의 얼굴을 마주하니 확실하게 그것이 와 닿는다.
“나를 죽여야, 운명이 바뀐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너는 나를 위해서도 울어주는 것인가? 네게 도움을 주는 척 하면서, 결국에는 너를 죽이겠다고 한 나를?
“그런데 왜 죽는 게 히이로 씨인 거예요.”
“그게 운명을 바꾸는 길이었음을, 나중에야 안 거다.”
“말도 안 돼요. 그럴 리가.”
“에무. 너는 네 세계로 돌아가라.”
“…….”
“나는 만족한다. 그러니까 너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네. 반드시. 제 세계의 사람들도 구하겠어요.”
“그럼 됐다.”
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무를 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에무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에무의 주위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처음 에무를 만났을 때 느꼈던 그것이었다. 에무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일 테다.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에무는, 내가 끌릴 수밖에 없었던 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히이로 씨도 구하고 싶었어요.”
대답을 듣지 않고 사라진 이의 자리. 나는 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죽음이 다가왔다. 이미 절반 가까이 사라진 몸은 나를 파멸로 이끌고 있었다.
그렇지만 괜찮다. 운명은 이미 바꾸었다.
“에무. 너는 이미 나를 구했다.”
*
CR의 바깥에는 이유 모르게 증식하는 버그스타들이 있었다. 아무리 해도 죽지 않고 다시 부활하는 그것의 원인을 파악하고 보니 태들 판타지에서 생긴 버그의 일종이라, 에무는 태들 판타지의 안에 들어가, 버그의 원인을 절멸하고 게임을 클리어해야 했다. 다행히 클리어에는 성공했지만 역 뒷맛은 씁쓸하다. 에무는 엔딩을 보고 알았다. 태들 판타지는 원래라면 마왕이 세계를 정복하는 게임이다. 그는 그 세계의 이방인으로서, 마왕의 앞을 가로막는 최종보스로서의 역할이었다. 그러니 원래라면 죽을 이는 마왕이 아니라 에무였다. 그러나 운명은 바뀌었다. 죽은 것은 마왕이고 살아남은 이는 그.
그는 게임 세계 바깥에 나와서야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히이로 씨’는 성공한 것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최후의 운명을 바꾸는 것에. 지금 돌아보니 마왕이 버그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에무가 게임에 뛰어든 상황 자체가 상정 외라면, 프로그래밍으로 창조되었을 마왕이 운명을 거스르게 된 것도 일종의 버그였던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분명히, 그의 의지였을 것이다.
“재미있었나?”
지친 듯 VR용 헬멧을 벗는 에무를 가장 먼저 맞는 이는, 도저히 당분간은 잊을 수가 없을 얼굴이었다. 에무는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끝이 씁쓸했지만요.”
“그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무를 내려다보는 카가미 히이로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했다. 그의 눈으로 게임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없었기에 답답한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막연하게 에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세계는 히이로가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니, 보는 것도 재미있을 지도 모른다. ‘히이로 씨’를 본 히이로의 반응은 꽤 궁금하니까.
“성공한 건 맞는 것 같군.”
히이로가 바깥쪽 문을 흘끔 보며 말했다. 멀찍이서 쿵쾅쿵쾅 소리가 들렸다.
“뽀삐 삐뽀빠뽀가 오는 모양이다. 벌써부터 시끄럽군.”
“다행이네요.”
에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네게 맡긴 것이 다행이군.”
“하하.”
히이로 씨 같은 완전 초보자에게 맡길 수는 없잖아요.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을 에무가 속으로 말하는 사이 히이로는 피곤한 듯 침대에 기대어 선다. 기다리기도 지루했던 것일까. 그런 히이로를 보고 에무는 물었다.
“히이로 씨.”
“뭐냐.”
“만약의 얘기인데요, 히이로 씨가 게임을 했는데.”
“나는 게임을 안 한다.”
단칼로 자르는 대답에 에무는 한숨을 쉬었다.
“아주 오랜만에 휴일 때 시간이 나서 게임을 한다고 치자고요. 그런데 적이 저를 닮았어요. 그럼 히이로 씨는 어떨 것 같아요?”
“…….”
그 상황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히이로는 한참 고민하다 어렵게 대답한다.
“게임을 하지 않을 거다.”
“엣, 그 쪽이에요?”
“기분이 나쁘지 않나. 적이 연수의라니.”
“그렇지만 평소 나를 짜증나게 했던 연수의를 두들겨 팬다거나 하는 결말 같은 건…….”
“자신이 얼마나 민폐인가는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연수의.”
“……노력하겠습니다.”
히이로는 에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게임을 끌 수 없다면, 맞서 싸우겠지.”
곧 그는 말을 이었다.
“적이 어떤 얼굴을 하던 적은 적이다. 그렇다면 물리칠 수밖에 없지.”
그 말을 하는 사이에 기나긴 틈이 있음을 에무는 알지 못했다. 에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본 히이로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걸 생각할 시간에, 외과 연수를 통과할 방법이나 생각해 보도록. 단 쿠로토를 막기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그는 먼저 올라가 버렸다. 역시 게임 비유를 든 게 문제였나. 에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침대에서 몸을 빼내었다.
에무는 아까까지 보았던 것들을 잊지 못했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했던, 그러나 결국에는 자신의 손에 죽었던 이. 그 며칠 동안에 남았던 추억과, 데이터 조각으로 흩어졌을 그의 운명. 그는 자신이 에무의 손에 죽는 것이 운명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마왕의 그 행동이 정말로 버그였다면 다른 의미로 그는 운명을 바꾼 것이 맞다.
그것이 정말로 해피엔딩이었을까.
적어도 죽을 때의 그는 후회가 없어 보였지만…….
‘그랬다면 좋겠네.’
에무는 기지개를 피고, 다음 작전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모인 CR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살아가기로 약속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호죠 에무에게는 아직, 구해야 할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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