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웨인 Jr.의 생활이라고 한들 특별한 것은 없다. 언제나 나를 찾아오지 않는 이를 위해 증오의 불꽃을 태우는 일 말고는 그다지. 나는 늘 증오를 불태우기 때문에 알고 있다. 증오를 태우는 것 또한 열정과 감정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 열정과 감정을 다른 이름에서 끌어오기도 한다. 링컨 마치라는 이름. 뭣 때문에 지었더라? 기억은 안 나지만 마음에는 드는 이름이다.
이전에 나는 이 이름을 대며 형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브루스 웨인 씨. 원하는 것 말인가요? 그저 당신이 제게 한 표를 주셨으면 합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얼마나 희열에 찼던가? 드디어 만난, 나의 증오의 원천. 나의 힘의 근원! 그리고 몇 번 다시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이윽고 밤의 고담을 지키는 ‘히어로’ 씨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담의 밤을 지키는 히어로 씨를 습격하며, 그에게 고통을 선사하던 그 때! 나는 희열 속에 있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는 것이다.
그렇게 설레던 시간도 잠시였다.
웨인 저택의 네트워크에는 운이 좋게도 침입할 수 있었다. 이조차 곧 들켜 정보를 수집할 수 없을 확률이 높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아주 우연히, 내 형의 어떤 사생활을 마주하고 말았다. 사생활이라는 부분은 인간 그 자체가 갖는 존재의 근원과 그다지 멀지 않다. 그러니 내가 형의 사생활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정보야말로 형에게 복수를 할 만한 또 다른 카드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로 본 그것은 문제가 있었다.
형은 어느 방에 있었다. 웨인 저택의 수많은 방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건, 형의 곁에 늘 붙어 다니는 늙다리 집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형보다 훨씬 거대한, 그리고 붉은 망토를 걸친 채로 푸른 슈트를 입은 사내였다! 나는 대단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형이 자신의 심복이 아닌 다른 이를, 응접실이 아닌 저택의 방에 들인단 말인가? 내가 형에 대해 몇 번 지켜본 바로 말하는 건데 그는 그다지 남을 믿지 않는다. 믿고 싶어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모순이기 짝이 없지만 그는 그랬다. 그런데 저 치는 믿을 만한 모양이지? 나는 나의 처지도 잊고 잠시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 뒤로 펼쳐지는 건 더욱 놀라운 상황이었다. 형이랑 그 사내는 몇 번 말을 주고받았다. 정확하게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세계를 지키느니 어쩌니 하는 말은 들렸다. 옷도 괴상한 것을 보니 끼리끼리 히어로 놀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사내는 형에게 키스를 시도했다!
그와 동시에 통신은 끊어졌다. 하필 이 때 보안망에 잡힌 모양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책상을 쾅 치고 있었다. 꽉 쥔 내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혼자 있었으니 망정이다. 이런 꼴사나운 광경을 법정의 누구라도 보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게 뭐지? 나는 내 반응에 대해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이상하다. 내가 이래야 할 이유가 뭔지를 모르겠다. 나는 찬찬히 내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두근거림. 거친 호흡. 두려움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흥미와도 거리가 멀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내가 형에게 갖는 감정과 이 감정이 대단히 가깝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나는 바로 당장 조사에 착수했다. 그 사내가 누구인지. 무엇이기에 형의 방에서 그러고 있었던 것인지! 그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복장이 너무나 특징적이었던 탓이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그는 외계에서 온, 세간에 슈퍼 히어로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슈퍼맨이라는 것을 간단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유명했다. 그런 주제에 웨인 가의 추문을 담당할 지도 모른다는 것인가. 이것은 나의 형의 ‘약점’일 것이며 흥미로운 요소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에 대해 찾으면 찾을수록 나는 점점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슈퍼 히어로? 그거야 아무래도 좋다. 보아하니 형과 슈퍼맨은 저스티스 리그라는 이름으로 함께 활동한 일도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우주에서부터 침공해온 악당에게서 지구를 지키는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고!
이상하게,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내가 이렇게 이성적이지 못한 놈이었나를 생각했다. 우선 진정을 해보자고. 왜 나는 이렇게까지, 저 슈퍼맨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지? 생각하다 깨달았다. 나는 화가 나 있었다. 이걸 알기 전까지의 나는 내가 화가 나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어리석음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하지만 이제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보이게 되었다. 그래. 슈퍼맨에게 화가 난다. 그럼 그 다음엔 뭘 하는가?
슈퍼맨을 공격해야지!
아니. 이건 조금 성급한 결론이다. 브루스 때처럼 법정이 모든 자료를 준비해 주는 상황이 전혀 아니잖아, 지금은. 그렇다면 나는 침착해질 필요가 있다. 최대한, 슈퍼맨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은 다음에 침착하게 슈퍼맨을 공격해야 하는 것이다. 음. 어떻게 해도 그를 공격해야 한다는 결론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군.
그러면 어떻게 공격을 할까? 링컨 마치라는, 법정이 제공해 준 자선사업가의 이름을 빌려볼까? 선량한 인물의 모습을 하고서 슈퍼 히어로에게 접근한 뒤에 공격하는 방법. 음, 나쁘지는 않지만 기각. 브루스 형이 알아볼 테니까. 그러면 역시 법정이 준 몸으로 직접 공격을 하는 게 좋을까? 슈퍼맨이 강하다고 해도, 어느 정도로 강할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불사의 몸을 가졌으니 괜찮지 않을까? 어떤 식으로 할지는 그 때 결정하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슈퍼맨을 노리기로 했다.
화가 나니까.
생각보다 내게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외계에서 온 어떤 도움 안 되는 녀석 때문에 슈퍼맨이 고담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담을 침공했기 때문에 배트맨 역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법정은 내게 말했다. 그들을 내버려두라고. 어차피 그들의 맹공으로 배트맨이 죽는 것이야말로 법정이 바라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법정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슈퍼맨의 도움 때문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과정은 어찌 됐든 배트맨은 살아남은 것이다.
법정은 내게 말했다. 지금 지친 배트맨을 치라고.
나는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내 나름대로 그들에게는 볼일이 있었으니까.
마침 저 멀리 옥상에 그가 보였다. 법정이 만들어 준 불사의 몸을 가지고 나는 막 싸움이 끝났을 배트맨, 나의 그리운 형에게로 뛰어들었다. 안녕, 나의 사랑스러운 브루스 형! 인사라도 하려던 나를 가로막고 서는 건 그 괘씸한 슈퍼맨이었다.
“다 끝난 줄 알았더니.”
“일단 끝나기는 했어.”
“그럼 이건 뭐야?”
나의 주먹을 팔로 막으며 슈퍼맨이 뒤에 있는 형에게 물었다.
“과거의 잔해 같은 것.”
“설명이 이상한데.”
잔해 같은 것은 뭐야! 왜 나를 그런 식으로 말해? 다시 화가 난 나는 그 빌어먹을 형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죽지 않는 몸이라 거리낌도 없던 나의 동작을 막은 건 또 슈퍼맨이었다. 저 얄미운 놈! 뭔데 자꾸 나와 형 사이를 가로막으려 드는 거야!
역시 죽여야겠어!
“네가 고담의 악당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알고 있지만…….”
슈퍼맨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나는 어렵게 피했다. 그의 공격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공격의 여파가 내게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만일 내가 이걸 정통으로 맞고, 불사의 몸인 것도 아니었다면 이 일격을 맞고 살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 보통이 아니었다.
“정말, 끝내주는 인기야!”
내가 자세를 정비하는 사이 슈퍼맨의 눈에서 빔이 뿜어져 나왔다. 아무리 외계인이라지만 이건 사기잖아! 속으로 몇 개의 욕을 퍼부으며 나는 그것을 가까스로 피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내 손가락 끝이 탈 뻔했다. 얼마 전에 열심히 다듬어 놓은 손톱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다니. 내 숨소리가 거칠어짐을 느끼며, 나는 슈퍼맨을 노려보았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브루스를 싸고도는 저 몸짓이며 행동까지, 전부. 원래 형은 내 것이어야 했다. 나의 원망을 전부 받으며, 내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해야 했다. 다시는 너를 버리지 않겠다고 누구보다 비참하게 내 앞에서 엎드려 빌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를 용서할까, 용서하지 않을까를 고민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나는 웨인 가에게서 버림받은 토마스 웨인. 형이 웨인의 적장자로서 가진 모든 것을 달라고 할까? 아니면 형을 달라고 할까? 그것을 고민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형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만났는지도 모를 낯짝만 두꺼운 외계인을 곁에 두고는, 내가 가까이 오도록 허락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선 곤란한 것이었다. 하다못해 저 슈퍼맨만 없었다면! 지금의 형은 나의 이상과는 조금 더 가까워졌을 지도 모른다.
“뭐야, 정말. 형. 오랜만에 만난 동생한테 인사 한 마디 없는 거야?”
“…….”
배트맨, 형의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반응하는 것은 슈퍼맨 쪽이었다.
“브루스. 자네한테 동생이 있었나?”
“너는 좀 닥치고 있어.”
결국 참지 못하고 욕이 튀어나온다. 정말, 이러면 내 품위에 어긋나잖아. 나는 어디까지나 내게 잘못을 빌러 와야 할 형을 따스하게 맞이해줄, 사랑스러운 동생의 포지션이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의 이렇게나 상냥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생각을 형은 알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나와는 눈 하나 마주치려 하지를 않는다.
“이봐. 그 말은 나를 이기고 나서 해야 할 것 같은데?”
슈퍼맨이 피식 웃었다. 저게 날 비웃어?
“난 형을 만나러 온 거거든?”
“네 형이 별로 네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슈퍼맨은 형을 흘끔 보더니 피식 웃으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 동작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
“그건 내 알 바 아냐. 난 형에게 할 말이 아주 많아서. 그러니까 내 형한테 얼쩡대지 말고 꺼져, 엿 먹을 외계인 자식아.”
나는 이를 한 번 갈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틈에 다시 슈퍼맨에게 뛰어들었다. 그는 나를 밀치려 했지만, 나도 학습 능력이라는 것이 있다. 아까처럼 똑같이 당하지는 않는다. 나는 슈퍼맨의 팔에 매달려, 그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격으로 잠시 주춤할 뿐이다. 초인이라 이거지. 그 자리에 그대로 발차기를 날렸다. 무게를 실어 날리니 그 놈도 뒤로 밀려난다. 나는 그 때쯤 팔을 놓아 한 바퀴 돌아 뒤로 물러섰다. 물론, 다음을 위한 일보였다. 하지만 내가 공격하려는 새를 슈퍼맨이 파고들어, 그의 주먹이 그대로 내 가슴에 꽂혔다. 어마어마한 충격이다. 불사의 몸도 쉬이 버티지를 못한다. 슈퍼맨의 일격으로 밀린 나는 근처에 있던 벽에 부딪혔다. 부딪힌 정도가 아니라 몸이 벽에 콱 박혀버렸다. 내가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쉬이 빠지질 않았다.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게 단순히 벽에 박혀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까 맞아서, 몸 어딘가가 망가진 모양이다. 빌어먹을!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나를 보며 슈퍼맨은 휴. 한숨을 쉬었다.
“이리저리 달고 다니는 게 많아 고생이겠어.”
“자네만 할까.”
몸을 푸는 슈퍼맨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형. 젠장. 젠장! 아무리 해도 몸이 안 빠진다. 저 외계인 자식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 몸이 영 말을 안 듣기는 해도, 이 몸으로 벽을 파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이봐, 이봐. 올빼미의 힘이 고작 이 정도야? 그렇진 않잖아, 응? 나는 몸에 힘을 있는 대로 주어, 결국은 나를 감싼 벽을 부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상황을 호전시킬만한 기회가 되지는 못했다.
“일도 끝났으니 자네 집에 들렀다 가도 되나?”
“알프레드를 곤란하게 하는 건 줄였으면 좋겠는데.”
“승낙인 것으로 하지.”
“정말 자네는 사람 말을 안 듣는군.”
“거부하지 않았지 않나.”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나눈다. 형의 어깨에 팔까지 둘러 가며, 슈퍼맨은 나를 보더니 핏 웃으며 형과 함께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감히 나를 두고 떠나? 역시, 화가 난다. 이 때 나는 내 안에 또 분노라는 감정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형에게 가진 복수심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다. 하지만 결국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 같은 감정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다짐한다.
언젠가는 저 슈퍼맨 자식의 낯짝을 내 발로 짓밟아 주겠어. 오늘은 힘이 아주 조금 부족하였지만 내가 법정의 힘으로 진화를 거듭하면, 그가 고담 땅을 다시 제대로 밟는 날이 오게 되면. 그 때에는 기필코.
나는 복수할 대상을 형에게서, 형과 슈퍼맨으로 바꾼다. 복수할 대상이 하나 정도 늘어나는 건 법정도 넘어가 줄 테지. 어차피 고담을 법정이 지배하기 위해서는, 슈퍼맨의 도움 또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정도는 알아서 판단하고 그러려니 하라고, 노인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