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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샘플 1Commission 2016. 3. 31. 00:25
C형.
하늘달냥님의 커미션으로 진행한 글입니다.
커플링: 테니스의 왕자 - 유키후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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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의 왕자 / 유키후지유키
유키후지유키의 소재 멘트는 '이제부터 거짓말을 할 거야', 키워드는 망각이야.
정적인 느낌으로 연성해 연성
http://kr.shindanmaker.com/360660
1
눈을 떠보니 낯선 곳이었다. 여긴 어디지.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곳이었다. 낯선 벽, 낯선 천장, 낯선 침대. 그리고 낯선 방.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라, 잘 잤어?”
그 낯선 방에는 어느새 사람이 있었다. 마실 것을 들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내린 서늘한 웃음의 남자였다. 누구였더라. 그는 그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
그가 처음으로 뗀 한 마디였다. 남자는 조금 놀란 듯, 하지만 곧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올리며 남자는 말했다.
“기억이 안 나?”
남자는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은, 보일 듯 말 듯 미묘한 느낌이었다. 누구였더라. 아주 낯선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머릿속에서 명쾌하게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러는 새에 남자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제가 들고 있던 잔을 그가 누워있던 침대 옆 찬장에 놓았다.
“일시적 기억 상실이려나.”
남자는 그를 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는다.
“뭐. 이것도 재미있게 됐네. 물이라도 마시며 천천히 생각해 봐.”
“…….”
그는 굳이 거기에 대답을 더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생각했다. 여기는 어디인가. 저 남자는 무엇인가.
“아, 참.”
그가 그러는 새에 방을 나가려 했던 남자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그를 보았다.
“이름을 알려주는 걸 깜빡 했네. 내 이름은 유키무라 세이이치. 부디 이걸로 뭔가 떠올려줬으면 좋겠네. 후지 슈스케 군.”
유키무라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후지는 그가 나간 방문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이 서늘히 빛났다.
2
유키무라 세이이치.
이름을 들은 뒤였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것들은 모두 떠오른 후지였지만 이상하게 그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뭔가 강한 것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일까.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들을 통해 후지는 ‘그렇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일시적인 기억 상실이라는 그의 말이 맞는 모양이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우선 자신의 이름과 가족사항. 그리고 이전에는 무엇을 하였는지도. 후지는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수술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것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라켓을 쥐던 그 손이 펜을 쥐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의 일이던가.
다만 문제라면 여전히 근본적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가. 후지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건만 여전히 머릿속은 짙은 안개 속이었다. 그러다 찬장에 놓인 컵이 보였다. 아까 유키무라가 갖다 놓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컵에 손을 대지 않았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굳이 손을 대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왜 그렇지? 후지는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안개는 그리 간단히 걷히지는 않았다. 결국 후지는 지금 바로 그 안개를 걷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였다. 그 대신 그는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기로 했다. 두뇌 회전이 빠른 그였기에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방은 지극히 깔끔했다. 평소에 자주 쓰는 방은 아닌 듯 보였다. 그러다 후지는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았다. 붕대가 있었다. 머리를 다친 모양이었다. 아마도 기억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이유가 이 것이리라. 왜 머리를 다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후 후지는 몸을 움직여보았다. 팔다리가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누워 있었던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상태를 보아하니 멀쩡하지도 않다. 어디에 부딪혔던 모양이다. 치료는 어느 정도 된 것 같고. 그러다 왼쪽 팔목에 꽂힌 링겔 바늘을 발견했다. 이것 때문에 그동안 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후지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약간 이질감은 있었지만 움직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후지는 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무언가 더 얻을 만한 정보가 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상의 수확은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 이 방이 거북했다.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본능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정작 기억을 못하니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다시 침대에 돌아와 앉았다. 그러다 후지는 다시 그 컵을 보았다. 투명한 물이 있었다. 어쩐지 거북하다. 후지는 그것을 힘껏 쳐내었다. 날아간 컵이 벽에 부딪혀 깨졌다.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것은 벽에 튄 물과 깨어진 조각이 되었다. 후지는 그것을 노려보았다. 곧 문이 열리고 유키무라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후지와 컵을 번갈아 보더니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생각이 났어?”
“아니.”
실눈을 뜬 후지가 눈읏음을 지으며 그를 보았다.
“다른 건 다 알겠는데, 네가 누구인지만 모르겠더라고.”
“그거 아쉬운 일이네. 섭섭한걸.”
“그거랑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
후지는 눈을 치켜떴다. 유키무라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조금 알려줬으면 하는데.”
“흐음. 글쎄.”
그렇게 말하며 유키무라는 근처에 있던 빗자루를 들고 와 깨어진 컵 조각들을 치웠다. 그 조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을 그였건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조심하는 게 좋아, 후지 군. 유리는 위험하니까.”
“충고 고마운걸.”
후지는 살짝 웃었다.
“그러니 이런 걸 깨지 않도록, 네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그래.”
“이렇게 요란하게 나를 부를 필요 없는데. 네가 필요하면 언제든 곁에 있어줄 수 있는 걸.”
컵 조각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유키무라는 말했다.
“흐음. 뭐라고 설명해야 옳을까.”
걸레를 들어 물까지 닦아내고, 유키무라는 후지에게 다가왔다. 침대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 그의 앞에 앉았다.
“바로 알려주기는 조금 그렇고. 아까처럼 힌트를 줄게.”
유키무라는 팔짱을 끼었다.
“나는 줄곧 여기서 너를 기다렸어. 네가 깨어나기를 말이야.”
“그래?”
후지는 의아한 듯 물었다.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낀 것이었다. 유키무라는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알겠어?”
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쉬운 일이네. 왜 나에 대한 것만 모르는 걸까. 나는 참 슬프네.”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오해야. 나는 충분히 슬픈 걸.”
유키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냐하면 너와 나는.”
후지의 손이 덥썩 잡혔다. 유키무라는 그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으니까.”
“설마, 나와 만담이라도 하자는 거야?”
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유키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나는 언제나 진지해.”
“진지하게 웃기려는 모양이네.”
후지가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상황적인 부분에서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을 보는 시선과 이 방과 모든 것. 후지가 인지하고 있는 일반적인 연인을 기다리던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이 들었다. 거기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할 정도의 거부감도 있었다.
“내가 뭐냐고 물어본 건 너야, 후지 군. 나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
유키무라는 그의 손을 놓았다.
“믿을 말을 해야 믿지 않겠어?”
“이게 왜 믿을 말이 아닌 거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며 유키무라는 검지손가락 끝으로 후지의 턱을 들어올렸다. 후지는 그를 노려보며 그의 손을 쳐냈다.
“내게 없는 건 기억뿐이야, 유키무라 군.”
후지는 살짝 웃었다.
“네가 말하는 것이 마냥 진심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는 뜻이지.”
“어라. 진심인데.”
“거짓말을 하려면, 눈빛부터 바꾸는 습관을 들이지 그래.”
후지는 차갑게 말했다. 그의 눈매는 다시 가늘어졌다. 일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숨기는 얼굴 그대로였다. 유키무라는 씨익 웃었다.
“거짓말은 아니야.”
“무슨 의미일까.”
유키무라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후지를 내려다보며 말헸다.
“사랑과 증오는 하나라고들 하지.”
후지는 유키무라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리카락 아래로 진 그림자가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를 이토록 미워하는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겠어?”
3
그가 방을 떠났다. 후지는 웃었다. 이제야 조금씩 명확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방과 이 상황, 그에 대한 것들이. 안개가 걷혀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안개 속에 감춰진 후지의 본능이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을 도와줬을 이에게 적개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분명치가 않은 것이었다.
후지가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분명 방어기제일 것이다. 그에 대한 것을 떠올리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몸이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을 안개로 가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떠올려야 할 만한 사항은 아닐 지도 모른다. 모르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후지는 여전히 의문이 들었다. 왜 자신은 여기에 있는가. 그랬다. 두 번째 의문이었다. 물론 첫 번째는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고.
나를 미워하는 너라고, 유키무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후지 자신이 그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그렇다면 남는 의문은 그의 목적이었다. 무엇을 위해서 자신을 여기에 두었는가. 그것이 분명치가 않았다. 이는 분명 머릿속에 짙게 낀 안개 때문일 것이다.
후지는 창문을 보았다. 눈을 뜰 때에는 햇빛이 많이 들어오고 있었건만,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시계도 없는 방인지라 그저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빛만이 그에게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후지는 침대 위에 누웠다. 놀랍게도 식욕은 생기지 않았다. 아직 떼지 않은 링겔 덕분일까. 후지는 제 왼쪽에 걸린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링겔의 바로 아래에 거즈 몇 개가 보였다. 후지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 바늘을 감싸고 있던 반창고를 떼어냈다. 그는 눈을 감고 바늘을 확 빼내었다. 살짝 고통이 느껴졌다. 바늘을 바닥에 던져버린 그는 곧 거즈를 피가 고이는 팔목에 대었다. 조금 쓰라렸다. 하지만 떼어버리고 싶었던 물건이었다. 이제 자기가 눈을 떴으니, 더 이상 필요가 없을 터였다. 바늘이 떨어진 바닥에 붉은 것이 조금 튀었다. 후지는 그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거즈를 계속 누르고 있자면 곧 어찌저찌 피가 멎었다. 원래는 조금 더 신중히 빼야 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계속 제 팔에 꽂아두고 싶지 않았기에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영양제조차 역겹다는 느낌이 들었더랬다. 그가 꽂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감정의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안개 속에 있을 것이었다.
‘냉정하지 못하네.’
후지는 스스로 그리 생각했다. 깨어난 이후로 계속 이 상태였다.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기억이 없는 상태가 불안함을 조성시키고 있는 듯 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가 컸다. 이 자리가 불편했고, 그 남자가 불편했다. 그렇다면 수는 하나였다. 벗어나는 것. 기억의 유무와는 관계가 없다. 여기서 나가야 했다. 기억이 없어 불안한 것은, 아마도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기에는 그 잃어버린 기억밖에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알게 되면? 그렇게 되면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후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문을 바라보았다. 김이 나는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온 유키무라였다. 유키무라는 그를 한 번 보더니 제가 들고 온 것을 근처 탁상에 놓았다. 그러다 바닥에 떨어진 링겔 바늘을 발견한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직 뗄 때가 아닐 텐데.”
“조금이라도 빨리 떼고 싶었거든.”
“나가고 싶구나.”
유키무라는 눈치가 빠른 이였다.
“그래.”
부정은 하지 않았다.
“내가 보내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나가는 걸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야.”
후지는 살짝 웃었다. 유키무라도 미소로 화답했다.
“하기는. 맞는 말이야. 나가는 건 네 자유지.”
유키무라는 후지에게 다가왔다. 그의 걸음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다만 나갈 만한 상태가 될 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유키무라가 그의 어깨를 확 붙잡았다. 어깨에 그의 체온이 확 느껴졌다. 후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유키무라의 행동에 놀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유키무라가 제 어깨를 잡기 위해 뻗었던 그 손. 후지는 분명히 본 기억이 있었다. 똑같은 각도로 뻗어왔던 그것을.
“아…….”
저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소리가 흘러나왔다. 기폭제였다. 그 손이었다. 안개가 무언가에 빨려나가듯 걷히고 있었다. 청소기가 빨아들인 것만 같던 그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개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던 것. 그 아프고 추한 것이 후지의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후지 군?”
그의 반응이 이상해 유키무라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다리가 풀리고, 유키무라가 막을 새도 없이 후지는 주저앉았다. 그의 머릿속은 어둠이었다. 검고도 끈적한 무언가가 그의 머릿속을 덮고 있었다. 지독한 증오의 감정. 어둡고 격렬한 것이었다.
어둡고도, 슬프고도, 격렬하여.
아프고도, 괴롭고도, 무거운 것이었다.
4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테니스를 하지 못하게 된 지로 3년. 평범한 직장의 주임으로 지내고 있던 후지였건만, 그의 일상은 평안치가 못하였다. 새로이 신입으로 들어온 얼굴이 지극히 불편한 이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유키무라 세이이치. 일전에는 라이벌 학교의 주장으로 만났던 이였지만, 후지가 그를 꺼려하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다른 이유 때문에, 결국 후지는 쉬는 시간에 그를 밖으로 불러내었다. 적어도 그의 의도는 명확히 알아야 했기 때문에.
“우연이야.”
그가 대답했다.
“그 때로 끝난 것 아니야?”
“끝났지.”
그는 차분했다. 후지도 일순 차분해 보였다. 아마도 둘 다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리라.
“끝났기 때문에, 네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거겠지.”
“역시 알고 왔구나. 그게 아니라면 네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시종일관 그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본색일 리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이였기 때문에.
“다시 할 생각은?”
“없어. 마찬가지 아니야?”
“응. 그래.”
유키무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미소가 유독 서늘해 보였다. 다만 그의 시선은 후지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어디냐고 하냐면, 정확히는 그의 뒤에 있는 무언가였다. 그러다 유키무라는 후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나는 네가 미우니까. 다시 할 생각은 없지.”
유키무라는 말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씨익 웃었다.
“그러면, 이걸로 됐네.”
그렇게 말하던 후지였지만 그와 동시에 유키무라가 후지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그의 어깨가 탁 잡혔다. 어깨에 뜨거운 체온이 확 느껴짐과 동시에.
“아니, 이제 새로 시작해야지.”
유키무라가 그를 밀쳤다. 후지도 보통 사내인지라 간단히 넘어질 리는 없었건만, 그의 습격이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져 말릴 새가 없었다. 일전에 병을 앓았던 이의 힘이라고는 쉬이 믿겨지지 않는 힘으로 후지는 뒤로 밀려났다. 갈색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렸다. 그에게 무슨 짓이냐고 물을 시간도 없었다. 옆에서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온 몸에 강한 충격을 느꼈다. 무엇이냐 물어볼 새도 없이, 그의 의식은 사라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후지가 유키무라 앞에 쓰러졌다. 그를 친 차 주인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운전석에서 나와 유키무라와 후지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지요. 괜찮습니다.”
유키무라는 그에게 말했다. 그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책임은 제가 질 테니, 문제 있을 시에는 이쪽으로 연락 바랍니다.”
유키무라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제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후지와 유키무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유키무라가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었다. 그래도 그는 가책을 느꼈는지, 유키무라가 후지를 병원으로 이끌 때까지 함께했다. 그 이후 절차는 간단했다. 피해자인 후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는 의외로 금방 나았다. 그리 되니 유키무라는 후지를 제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반대하던 의사에게는 각서까지 쥐어주며 어렵사리 데려올 수 있었다.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도 유키무라는 어떠한 감정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제 안에 잠들어 있는 깊은 어둠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꺼내기에는 아직 빨랐다. 그 모든 것은 그가 깨어난 뒤. 여러 의미로 기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서 눈을 뜨련. 아이야.
질척한 감정이 불타오르는 것을 그는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5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었구나.”
한참 뒤, 후지는 말했다.
“잠시 좀 생각하고 있었거든.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랬구나.”
유키무라는 웃었다.
“답은 찾았어?”
“그래. 덕분에.”
후지는 그렇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키무라를 밀쳤다. 유키무라는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그 앞에는 후지의 매서운 눈매가 있었다. 유키무라는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짓을 했었네. 너.”
“우리 집 생활은 즐거웠어?”
“즐거웠지. 아주.”
“그거 참 다행이네.”
그와 동시에 후지가 유키무라의 가슴을 발로 찼다. 유키무라는 주저앉았다. 맞은 부분을 감싸 쥐며 유키무라가 말했다.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내 앞에 있는 벌레를 밟을 정도의 힘은 있어.”
그가 서늘하게 웃었다.
“벌레씩이나 될 줄이야. 감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감사한 건 오히려 내 쪽이지. 나를 여기에다 모시려고 고생 깨나 하셨을 텐데 말이야.”
“그 정도는 약과야.”
유키무라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쯤이야.”
“아아. 그러십니까.”
후지가 유키무라 앞에 쭈그려 앉았다. 시선이 곧바로 마주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복수인지, 나는 전혀 모르겠네.”
“네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유.”
유키무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답은 이미 알고 있잖아, 후지 슈스케 군.”
“웃음이 다 나오네.”
후지는 피식 웃었다.
“분명 우리는 그 때 정리한 것 같은데.”
후지의 말에 유키무라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정리한 건 너 혼자뿐이야.”
유키무라는 그 말을 더했다.
“혼자서 편해지려 했어? 유감이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건 허용하지 않는 주의라서 말이야.”
후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생각보다 미련이 많은 남자였네.”
“나도 놀랐지. 내 생각보다 친구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줄은.”
후지가 눈을 크게 뜨더니, 유키무라의 뺨을 갈겼다. 얼굴이 홱 돌아간 그였지만 곧 시선을 돌려 후지를 쏘아보았다.
“함부로 말하지 마. 그에 대해서.”
후지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네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하하.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재미있어.”
유키무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럴 거면, 그 때에 왜 내 말에 동의했는지를 모르겠네.”
후지가 말했다. 유키무라는 얻어맞은 뺨을 만지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야 나도 그 때엔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후지가 핏 웃었다.
“다만 조금 억울해지더라고. 내가 먼저 그 얘기를 했어야 했는데.”
유키무라가 웃으며 말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구나.”
후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기는, 너도 어지간히 사람을 밑에 두지 않으면 성미가 안 차는 것 같으니. 그러니 ‘그’를 그렇게 만든 거겠지.”
그와 동시에, 유키무라의 주먹이 후지의 얼굴을 강타했다. 세게 얻어맞은 그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몸을 추스르며 그는 확 유키무라를 쏘아보았다. 유키무라는 핏 웃었다.
“돌려준 거야.”
“그가 어지간히도 네 역린인 모양이구나. 차인 게 그렇게도 억울했어?”
“그 이상 말하면, 가만히 있지 않아.”
“가만히 있지 않으면. 그 때처럼 또 나를 밀기라도 할 거야? 안타깝게도 여기엔 날 쳐줄 차가 없는데.”
“적당히 해 둬, 후지 슈스케 군. 나는 의외로 인내심이 많지가 않아.”
유키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지 역시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다시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그 때처럼.
이별을 선고하던 그 때에도 이렇게 그들은 서 있었더랬다.
6
“어찌 되었든.”
이윽고 후지는 말했다.
“여기에 더 이상 있을 수는 없겠어.”
유키무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잘 알면서 이러셨을까.”
후지는 가늘게 눈을 떴다.
“보낼 수밖에 없겠지. 나도 알아. 나도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까.”
그 말에, 후지는 일전 기억을 잃었을 때에 생각한 것을 떠올렸다. 도대체 그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
“목적이라고?”
그래서 후지는 되물었다. 유키무라는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어라. 궁금해?”
“안 궁금하다면 이상할 거야. 보통은 이런 미친 짓 잘 안하니까.”
후지는 웃으며 화답했다.
“아아. 그렇겠네. 정상적인 짓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아무렴.”
유키무라는 납득한 듯 했다. 물론 그 납득이라는 것이 어느 의미의 납득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래. 좋아. 후지 군. 나는 이제부터 거짓말을 할 거야.”
유키무라는 활짝 웃었다. 다만 그의 입꼬리는 비틀려 있었다.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어?”
후지는 차갑게 대꾸했다. 유키무라는 피식 소리를 내었다.
“그도 그렇네. 그럼 그 거짓말의 연속이라고 해 둘게.”
후지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유키무라는 그런 그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말을 이었다.
“아주, 사랑했어. 그 뿐.”
“거짓말이네.”
단호한 대꾸였다.
“그렇다면, 이제 가도 되겠지?”
정말로 마음에 담지 않은 듯 후지는 말했다. 유키무라는 어떤 의미인지 모를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후지는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두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던 그의 뒤에서 유키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Bye. My sweet poison.”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굉장히 명확하게 후지의 귀에 들려왔다. 후지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안녕.”
그는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 밖에서는 푸욱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 방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
“어라, 안녕.”
집 밖으로 나가려던 후지는 뒤를 돌아 그것을 보았다.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그는 걸었다. 그리고 피를 뒤집어 쓴 그것을 향해 후지는 인사했다.
“그 칼로 나를 찌르려 했던 것 같은데. 왜 너를 찔렀는지는 잘 모르겠네. 칼이라도 놓쳤던 거야?”
그것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지.”
후지는 한숨을 쉬었다.
“뭐가 널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네. 황제였던 너를 말이야.”
그것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나다 군이었을까. 아니면 나일까. 모르겠네.”
침묵.
“그럼. 안녕. 유키무라 군.”
후지는 대문을 열었다. 어느 새 다시 뜬 아침의 햇살이 거기에 있었다. 햇살은 아주 고르게도 핏덩이와 그를 돌아가며 비춰주고 있었다. 그 바깥을 향해 후지는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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