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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샘플 5 - 유망(有望)Commission 2016. 3. 31. 00:31
C형.
하늘달냥님의 커미션으로 진행한 글입니다.
커플링 : 테니스의 왕자 - 유키후지유키
1
흔히들, 눈에 띄는 재능이 있는 자들을 보고 유망하다, 혹은 유망주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유망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의미이다. 유망하다는 말 속에는, 재능이 아직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는 의미도 포함이 되어 있다. 유망주, 그리 칭해지는 이들이 지닌 재능의 꽃은 필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재능의 꽃이 지는 것은 아주 한 순간이다. 눈을 깜빡거렸을 뿐인데 이미 잡을 수 없이 멀리 떠나버리는 일도 있다. 찰나의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하늘을 누리던 이가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재능을 이미 꽃피운 이들에게도 그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니 아직 피지도 않은 존재에게는 더욱 가차가 없는 절망이다.
후지 슈스케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암이라고 했다. 이미 상당히 전이되어 얼마 살지 못한다고 했다. 빛나는 유망주는 그렇게 한 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그랬습니까.”
그러나 의외로 후지는 미련을 느끼지 않았다. 후지는 그 특유의, 눈을 감으며 짓는 웃음을 보였다. 진찰한 의사 쪽이 오히려 당황한 얼굴을 한다. 젊은 사람에게 암이라고 하면 보통은 하늘이 무너진 얼굴을 하기 마련이니 의사의 당혹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의사의 표정을 보면서 후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 저는 언제 죽을까요?”
의사의 답은 잠깐 망설인 뒤에 나왔다. 3개월 안이라고 했다. 생각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기간이다. 진찰실을 나오며 후지는 한숨을 쉬었다. 그 자신이야 별 특별한 생각이 없었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 슬퍼할 사람들이 있을 터. 몇 명 생각해보았다. 의외로 제법 있다. 그 인원 수를 세어 보다 곧 그런 생각들조차 무가치함을 깨닫는다.
후지의 병에 대한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모님에게도 전해지게 되었고, 슬퍼하는 가족들을 뒤로 한 채 기약 없는 하루들을 보내기 위해 그는 병실에 눕게 되었다. 병원의 천장과 바깥을 번갈아 바라보며 죽을 날만을 세는 것이 이제 유일한 낙이 되었다.
멍하니 누워 있으면 잡생각이 오간다. 마음을 나눌 정도로 친했던 누군가에겐 나의 병을 알려야 할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알려주면 좋을까. 알려도 좋을까.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게 나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제비가 남쪽으로 날아갈 때 누군가에게 일일이 소식을 전하고 가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의 죽음은 여행을 떠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기분이었다. 아예 조용히 사라져버리면 어떨까. 만일 나의 장례를 치르면 알게 될까. 내가 가진 연락처로 누군가가 알리려나. 요란스러운 죽음은 싫다. 그러나 의외로 질긴 인연 탓에 분명, 죽음의 끝은 요란스러워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말이라도 해야겠네. 후지는 생각한다. 그럼 누구에게?
후지는 제 핸드폰을 켜 연락처를 보았다. 몇몇 눈에 띄는 이름들이 보인다. 세이가쿠의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신경 쓰이는 몇몇. 키쿠마루는 무리겠네. 오오이시는 잘 이해해주겠지만 어렵겠네. 머릿속에서 몇몇 사람들을 지워가다 보면 남는 이들은 두 명 정도다. 데즈카 쿠니미츠, 에치젠 료마. 그 익숙하고 그리운 이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명은 독일에 가 있고, 한 명은 미국에 가 있을 것이다. 후지는 고개를 저었다. 연락도 잘 안 되는 이들에게, 더군다나 제일 마음이 가는 이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조용히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되도록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여보세요. 나인데.”
결국 후지가 전화를 건 이는, 생판 다른 사람이었다.
“거짓말일 줄 알았어.”
고요한 병실 안에 병문안을 온 이는, 후지를 보자마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킁킁거리며 후지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는, 내려온 제 곱슬머리를 뒤로 슬쩍 넘기며 그를 쳐다보았다. 잡아먹을 듯한 시선. 언제 보아도 거북하기 짝이 없지만, 후지는 여러 이유로 그와는 인연을 끊고 있지 않았다.
그를 소개하자면 중학 시절부터 이어져 오는 선의의 라이벌이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징하게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이었다. ‘유망주’ 정도였던 후지와는 달리 그는 이미 재능의 꽃을 피운 상태였다. 지금은 미국으로 간 에치젠 료마와 더불어, 그는 현 일본 테니스의 희망 같은 존재였다.
유키무라 세이이치. 한 때 강력한 ‘벽’이었던 존재.
그에게도 한 번의 시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련을 뛰어넘고 돌아왔다. 재능을 가진 자의 좌절과 극복이라는, 누군가에게는 감동적인 사연을 그는 제 넘치는 재능과 버무려 유키무라 세이이치라는 존재에 빛을 더하고 있었다. 후지는 유키무라를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에도 하얀 얼굴이었지만, 병기가 가신 뒤에도 그의 얼굴은 하얀 편이었다. 그것이 병실 조명과 어우러져 마치 죽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었고 죽을 이는 후지였다.
“내 말을 못 믿었던 거야?”
“아니. 너무나 놀라운 소식이라 그만.”
유키무라는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의외라는 듯, 혹은 당연하지 않겠냐는 듯.
“뭘 새삼. 너도 병은 있었잖아.”
“그러니 남들보다는 덜 놀랐겠지? 아마 너희 동료들 정도였으면 까무러치지 않았을까?”
“그런가.”
후지는 다시 웃었다. 습관 같은 그것을 자연스레 드러냈다. 유키무라는 가볍게 웃고 있었다. 강자의 여유 같은 미소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의 그는 그야말로 빛나는 자였다. 언제 목숨이 꺼질지 모르는, 고꾸라진 유망주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도 믿어지진 않네. 설마 네가 병일 줄은.”
“그러게.”
“너는 오래 살 것 같았거든. 오히려 그런 부분으로는 에치젠 쪽이 위태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이란 모르는 일이라는 거지. 과거의 너처럼.”
유키무라는 어깨를 으쓱대며 웃었다.
“그러네. 그 말이 맞아.”
유키무라는 다시 제 옆머리를 뒤로 넘겼다.
“즉, 앞으로 네 상태 역시 모르는 일이라는 얘기.”
“그럴 리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후지는 고개를 저었다.
“희망이 있는 것과, 희망이 이미 사라진 것은 같지 않아. 너에겐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겠지만…….”
“너는 다르다는 거야?”
유키무라는 후지의 침대에 슬쩍 제 몸을 앉혔다.
“글쎄. 네 스스로 희망을 없애고 있는 건 아닐까?”
병실 안을 울리는 목소리는 마치 비웃는 것 같다. 그럼에도 후지는 얼굴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대신 그 불쾌함을 양식 삼아, 제 절망으로 한 번 삼켜낼 뿐이었다. 후지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유키무라는 굳이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곧 할 일이 있다며 조용히 그의 병실에서 빠져나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했지만, 유키무라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을 후지는 곧 후회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후지의 병실을 찾았다. 비시즌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시즌이 들어가도 달랐을까. 제 옆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유키무라를 보며 후지는 한숨을 쉬었다. 혼자 죽고 싶어서 그에게 연락한 것이었지만 최악이었다.
‘이쪽이 더 끈질기잖아.’
절망의 밑바닥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무엇을 시선에 담든 어둡고 답답하다. 특히나 빛의 공간에 앉아 있는 이들은 제 몸이 가리는 빛 때문에 더욱 짙은 그림자를 뿜어내고는 한다. 후지의 주변엔 전부 빛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 역시 빛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밑에만 구멍이 파였다. 끝없이 떨어지는 절망의 구멍 너머의 사람들은 너무 눈이 부셨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몸이 사라지더라도 그들은 어차피 빛이 될 것임을 알았으니까. 그러나 곧 싫어졌다. 전부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후지는 제 스스로를 저주하고 싶어졌다.
몸은 계속 아팠다. 암세포가 전이된 부분은 이제 습관적인 고통으로 제 존재를 드려냈다. 차라리 어서 눈을 감고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애써 잠에 들어 아예 영원 속으로 잠길까 해도 고통이 그럴 시간조차 주지를 않는다. 이제 나는 어떻게 죽는 것일까. 마지막 순간까지 이 고통을 느끼며 죽게 되는 것일까. 지겹기 짝이 없다.
구역질이 난다. 그 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안색이 나쁘네.”
후지를 몽롱한 의식의 세계에서 끌어내는 건, 방금 떠오른 그 얼굴이었다. 유키무라는 치켜 올라간 눈매를 살짝 내렸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이 온정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키무라가 후지의 어깨에 손을 댔다. 후지는 그것을 쳐냈다.
“괜찮아. 유키무라 군.”
애써 웃으며 후지는 말했다. 조금 딱딱한 침대에 손바닥을 대어 힘을 주었다. 어질거리는 중에도 그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크게 숨을 들이쉬며 앉았다. 유키무라는 후지의 옆에 서 있었다. 길게 내려온 옆머리가 아까까지도 보였던 그의 눈을 가렸다.
“의사 선생님 불러줄까?”
그가 물었다. 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도 네가 사라지면 좋을 텐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 도로 내려간다. 거짓말처럼 구토감이 사라졌다. 후지는 씁쓸히 웃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네가 옆에 있으면 괴로우니까. 제발 가 달라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유키무라의 얼굴을 보았다. 읽기 어렵다. 그는 언제나 약간의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는 이였다. 물론 후지 역시 그러했다. 웃음으로 대부분의 것들을 감출 수 있었으니까. 아마 유키무라도 후지의 마음을 쉬이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후지에게 그 정도 확신은 있었다.
그렇기에 감출 수 있는 마음도 많았으니까.
왜 그랬을까. 다시 한 번 후지는 유키무라에게 전화를 건 것을 후회했다.
그가 유키무라를 선택했던 것은 일종의 미련이었다. 데즈카나 료마 쪽과 달리 걱정을 덜 해줄 것이라는 가정도 어느 정도 포함은 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오히려 걱정이 없다. 그들의 미래는 밝고, 각자의 길을 나아갈 것이고, 그 길에 자신은 일종의 비료로 남을 것을 안다. 그들은 자신을 걱정하고, 자신을 지키지 못함에 후회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유키무라는 달랐다. 유키무라의 미래가 다른 이들과 다를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후지는 사실 그의 빛에 감싸인 이들을 부러워했다. 그의 빛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 역시 유키무라의 빛을 알고 싶고, 느끼고 싶었다. 그렇기에 지금이나마 잠시. 아주 잠깐 알고 싶었던 미련 수준이었다. 그것이 어째서 이렇게 커진 것인가. 왜 그는 자꾸만 제 곁을 맴도는가. 이제 후지의 용무는 끝이 났다.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나 가라는 소리를 후지는 끝내 하지 못한다. 그의 절망이 유키무라의 빛을 삼키고 있었다.
2
후지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정말로 희망을 포기한 모양인지 그는 회복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포기한 거 아니야? 그렇게 물었던 날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더랬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빛이 되기를 포기한 것 같다. 유키무라는 잠든 이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 짙게 서린 어둠을 보았다. 나을 수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는 병마의 신음을 들으며 절망하던 과거의 자신이 유키무라는 살폿 떠올랐다. 잠든 이를 그 절망에서 끌어내고 싶었다. 유키무라에게 그 정도의 열의는 있다.
언제부터 그런 열의를 가지게 되었을까. 라이벌 학교의 견제할 정도로 뛰어난 선수 정도가 첫 인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와 얽힐 일이 자주 생겼다. 그리고 그는 유키무라의 둥지 안에 들어가 있었다. 원래 둥지에 있던 이들과는 다른 형태로. 그래서일까. 지금 자신이 열의를 불태우는 것은.
후지는 딱히 스스로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유키무라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과 싸우지 않고서, 순순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를. 아마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유키무라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지녔던 병은 충분히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유키무라를 죽음의 길로 인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지의 병은 그것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 일말의 차이가 그를 절망으로 이끌고,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한 것이 틀림이 없다. 의외로 그는 야심이 없는 인간이기도 했으니까.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유키무라는 자신이 아는 다른 이들을 생각한다. 그들이라면 분명히 싸울 것이다.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에 제 둥지 안에 몸을 틀 수 있었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러나 여전히 유키무라의 둥지 안에 있었다.
“계속 있어주네. 유키무라 군은.”
몇 번 병실에 오고 갔다. 비시즌이라 다행히 시간이 많이 나서 틈틈이 갈 수 있었다. 매니저에게는 ‘애인이라도 생겼냐’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가 죽을 생각이라면 어차피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음 끝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유키무라는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제 둥지 안에 머무는 이가, 제 허락도 없이 떠나가려 한다. 그것을 유키무라는 참을 수가 없었다.
“후지 군.”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이를 불렀다.
“왜.”
“죽지 마.”
마치 실없는 소리인 양 말을 꺼낸다. 후지가 핏 웃는 소리가 들린다.
“무리겠네, 그건.”
“네가 사라지면 재미가 없어져.”
유키무라가 말하자 후지는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랬어?”
“그럼.”
“의외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줄 알았어.”
후지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유키무라는 한숨을 쉬며 후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너랑 내가 아무 연관 없는 사이도 아니고.”
후지의 대답은 없다. 그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긴다.
“역시, 잘못 선택했어.”
그 다음 말이 이어진다. 유키무라는 머리를 슬쩍 뒤로 넘겼다.
“너에게 알리는 게 아니었어.”
유키무라의 얼굴이 아주 살짝 굳는다.
“어째서?”
창문 밖에서 갑자기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유키무라는 후지를 노려보았다. 후지는 예의 그 미소 띤 얼굴이다.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으니까.”
후지는 말한다. 후지가 그에게 처음으로 꺼낸 마음속 소리였다. 그러나 유키무라는 그것이 진심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았어?”
후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안타깝게도, 누군가에게 말하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야. 네 그 바람을 이뤄줄 수는 없겠는걸. 에치젠에게 알려줘 볼까?”
“왜 료마야.”
“그 녀석이라면 꽤 동요해 줄 테니까.”
유키무라는 살짝 미소를 짓는다. 후지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까보다 살짝 시선이 매서워짐을 느꼈다. 유키무라는 만족했다.
“아니면 데즈카 쪽도 괜찮겠네. 어차피 연락처는 알고 있고. 세이가쿠 쪽이 불편하다면 우리 팀 애들이라도?”
“무슨 수작인 걸까?”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킨 후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작을 부리진 않았어.”
유키무라가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 나를 굳이 도발하는 이유가 뭘까?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겠네.”
“뭐, 이러면 다른 사람들한테 말이라도 할까 해서?”
“웃기는구나.”
“농담인거 바로 알아채네.”
후지는 유키무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키무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싸늘한 눈으로 후지를 보고 있었다. 차분하게 불꽃이 이글거린다. 그것은 이유 모를 격정이다.
“저기, 후지 군. 난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거야.”
질문을 던지는 유키무라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정말로 조용히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후지는 그 말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싶었어. 하지만 네 말대로군. 네게 말한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네. 바보 같은 선택이었네.”
그렇게 말하며 후지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지친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으라는 듯, 듣지 않아도 된다는 듯. 그는 유키무라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고서는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여기에 누워 있으면 날짜 세는 일밖에 못 해.”
“대충은 알아. 그 기분.”
유키무라가 대답했다. 병실에 누운 경험은 그 역시 있었으니까.
“네가 센 날짜는 희망의 날짜겠지.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
“너도 그럴지 몰라.”
“아니. 죽는다고 했어. 이미 늦었다 하더라고.”
후지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너도 그걸 아니까 자주 오는 것 아니야?”
후지가 물었다. 유키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지긋지긋하네. 필요할 때마다 말 돌려버리는 거.”
유키무라는 대답 대신,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 와 후지의 옆에 앉았다. 오늘은 허투루 갈 생각이 없었던 탓이다. 창문 바깥에는 계속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것에 유키무라의 오감은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남의 감각을 빼앗는 식으로 살아온 탓일까. 아니면 죽음에 가까웠던 적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유키무라는 아까부터 밀려오는 불안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발을 가한 것도 그래서였다. 마치 온 세상의 공기가, 그가 오늘 죽는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었으면 했다. 그다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제 둥지 안의 새가 허락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정말. 너랑 지내면서, 그게 제일 싫었어.”
그걸 후지 본인도 느끼는 것일까. 오늘따라 그의 말은 진솔하다. 유키무라는 평소와는 다른 기류를 알았다. 유키무라가 아는 후지 슈스케는, 유키무라의 앞에서 제대로 진심이란 걸 내비친 적이 없는 이였으니까.
“상대를 잡아먹을 생각으로 만만이면서, 굳이 그걸 감추려 들지. 챙기지 않는 척을 하면서 은근히 챙기기도 하고.”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네.”
“위선자라고 생각했어.”
웃으면서 뱉을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유키무라는 웃으며 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짢아 보이네.”
“그래?”
“뭐, 오늘따라 나도 이상하다. 평소엔 절대 안 하는 소린데.”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유키무라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내려앉고 있음을. 그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주변에서 많이 보았던 그것이다. 그는 그것을 통칭 ‘사신의 부름’이라 칭하였다.
“아무튼 정말 싫었어, 그 위선.”
후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인 채이다.
“그걸 받아들인 건 어디까지나 날 위해서였지만.”
“내가 돌려주고 싶은 소린데.”
유키무라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 스스로도 예민해진 탓이었다.
“너 역시 날 속여 왔잖아? 그 웃음으로. 나를 싫어하면서도 언제나 적당히 그걸 감춰 왔지. 그렇다면, 굳이 내가 너를 진심으로 대할 필요는 없잖아. 적당한 위선은 최고의 무기야.”
틀린 말은 아니다. 제왕에게 있어 위선은 필연적이니까. 그러나 후지가 그것을 싫어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후지는 보고 싶었다. 그의 진심이라는 물건을. 뒤틀려 있는 그 내면을. 릿카이의 황제 정도나 알 법한, 기저에 깔려 있는 짙은 어둠을. 그러나 그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후지는 눈을 찌푸렸다. 이제 고통은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뚜, 뚜. 옆의 심전기가 격렬히 울리고, 그는 이제 더 이상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악!”
갑자기 일어난 변화다. 유키무라는 드물게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사를 부르려고 하는 그의 손을 후지는 덥썩 붙잡았다. 삐, 삐, 삐, 삑. 심전도기의 기계가 격렬히 울린다. 어째서! 유키무라가 소리 없이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팔을 꽉 붙잡고는, 고통을 참아내며 웃고 있었다.
“유키, 무라.”
힘없이 그의 이름이 울린다. 늘 알던 그 목소리가 아니다. 후지를 바라보는 유키무라의 눈이 초점을 잡지 못하고 떨린다.
“이제야, 겨우 보여주네…….”
고통을 집어삼키며 후지가 또 한 번 웃는다. 그만 좀 웃으라는 말을 하려다 차마 입에 담지는 못한다.
“꼭, 보고 싶었어. 네 진심이라는 걸…….”
“너.”
“진작 이럴 걸 그랬나. 후련하네…….”
무슨 말이야. 무슨 소리냐고. 입 안에 차오르는 말들을 뱉지도 못한 채로, 유키무라는 후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것이 끝임을 직감했다. 저 심전도기의 소리가 멎는 것은 이제 곧이다. 그 안에 최대한, 살아 있는 이의 모습을 담아둬야 한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모든 감각이 날카롭다. 무엇이든 그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
“나는 네게 바라는 게 있었어. 하지만 넌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지. 내가 릿카이의 사람이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거친 숨을 뱉으며 후지가 하는 말은 유키무라에게 날카롭게 새겨지고 있었다.
“왜 그런 소릴 하는 걸까.”
“너는 우리에게 절대자로 보이기를 바랐겠지.”
슬슬 웃는 것도 괴로운 모양인지, 후지는 아파 오는 배를 제 손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다. 빠르게 소리를 내는 심전도기까지 더하면 현재 분위기는 지나칠 정도의 긴장 상태였다.
“그러니까 진짜 마음을 보여주지 않은 거고.”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네가 원하는 그 진짜 마음이라는 게 대체 뭐야. 유키무라는 답답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다 문득 어떠한 것을 깨닫는다.
“유키무라 군.”
그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네게만 내 병을 말한 건…….”
그 말까지 하고 후지는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이라도, 네 진심을, 너를 보고 싶었던, 내 미련.”
후지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유키무라가 그의 손을 잡았다. 고통으로 움켜쥔 것이 아닌 후지의 다른 손이, 유키무라의 양손 안에 그대로 들어갔다.
“잘 들어.”
실은 애써 숨기려 했던 게 있었다. 죽을 때까지 무덤 속으로 안고 들어가려던 감정이다. 제 둥지 안에 새로 자리를 잡은 이는, 릿카이나 다른 소중한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그래서 일부러 더, 그의 앞에서는 숨겼다. 철저한 위선으로 무장한 가면만이 그의 감정을 온전히 숨길 수 있었으니까.
“네 말대로 나는 진심을 감췄어. 네게 말한들 무리인 감정이었으니까.”
후지는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유키무라는 느꼈다. 그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 안 돼. 유키무라는 절실한 얼굴을 하며 그를 보았다. 후지의 눈의 초점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삐, 삐. 심전도기의 소리도 빨라지고 있었다.
“후지. 실은 너를…….”
단어를 말하려는 순간, 심전도기가 격렬하게 장음의 소리를 냈다. 유키무라는 눈을 감았다. 붙잡은 손의 체온이 식고 있음을 느꼈다. 유키무라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죽은 이의 얼굴을 보았다. 후지는 눈을 뜨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유키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을 계속 담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걸 보니 더욱 입 안에서 맴도는 그 말이 아쉽다. 유키무라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젠장. 어째서.”
왜 그 마지막 말만을 듣지 못한 거야. 유키무라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체온이 사라져가고, 딱딱하게 굳어가는 그 손을 놓지도 못한 채로. 살아있는 이는 곧 고개를 숙였다. 위선의 가면을 쓴 이에게는 진심의 눈물조차 쉬이 허용되지 않는다. 차마 꺼내지 못했고, 전해지지도 못할 그 말을 유키무라는 제 안에 새기고 또 새기었다. 어차피 무덤까지 가지고 갈 말이었다. 이제 와 새삼스레 전하지 못하였다 한들 의미가 있겠는가.
좋아했어.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
이제 이 말들은 그대로 유키무라의 가슴 속에 묻힐 것이다. 그대로 유키무라는 천천히 후지의 손을 놓았다. 그가 손을 놓음과 동시에 병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말로 끝임을 유키무라는 직감했다.
짧은 꿈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작별이야. 후지 군.
환자의 사망 확인을 위해 달려오는 의료진들을 뒤로 한 채, 유키무라는 천천히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3
“왜 말하지 않았어?”
“후지 군은 조용히 죽기를 원했거든.”
“그게 그 사람의 진심일 리 없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쩌면 당신과 죽길 원했을 지도.”
“그럴 생각은 없는데.”
“그거 알아? 후지 선배, 당신 엄청 싫어했어.”
“……너무 새삼스러운 정보 아닐까?”
통화를 끊으며 유키무라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나만 알고 있었구나. 너도 참 고단수네.’
결국 죽은 이의 부고를 전하는 일은 유키무라가 하게 되었다. 물론 유키무라가 어느 정도 친밀감을 가진 이들에게만 전했다. 그 뒤로는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아마 죽은 이들도, 자신이 이 정도만 하기를 바랄 것이다. 아마 이것으로도 차고 넘칠 것이다. 유키무라는 제 방 벽의 몸을 기대다, 흘끔 달력을 보았다. 그는 후지의 병실에 가기 시작한 날과 가지 않게 된 날의 사이를 세어 보았다. 약 한 달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 중에서 진심을 전했던 날은 단 하루.
짧고도 긴 시간이다. 아직 남은 말은 한 무더기이다. 그러나 그 말들은 유키무라의 안에서 화장(火葬)되었다. 불에 타 가루가 된 말들은 마음의 무덤 속에 차분히 자리를 잡을 것이다. 영원히 꺼내지 않을 말이 되어 언젠가 그 몸이 죽게 되면 함께 타올라 사라질 것이다.
‘네게 바라는 게 있었어.’
끝내 그것이 무엇인지 후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무엇을 바라고 마지막에 그 말을 꺼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릿카이의 사람들이라면 달랐을까? 라고 했다. 그럼. 달랐겠지. 너는 그들과 다르니까. 유키무라는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네가 바란 걸 내가 이루어주지 못했다 했지. 네가 앓았던 만큼 내게 복수한 거라면 성공이야. 후지.’
유키무라는 천천히 다시 눈을 뜬다. 제 방의 풍경이 살아있는 이에게는 또렷이 보였다.
‘덕분에 나는 널 평생 잊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의 화장은 끝났다. 장례도 마쳤다. 마음 속 무덤이 무사히 세워짐을 확인한 유키무라는 개운한 듯 활짝 웃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트레칭을 하며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죽은 이를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살아 있는 이상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도리임을 아니까. 다행히도 내일부터 새 시즌에 돌입할 것이다. 새 훈련과, 새로운 마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이들과 살아 있는 이들이 유키무라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잊을 생각도, 딱히 없었지만.’
그러니 무덤 속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 묻어 두고 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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